이번 주 묵상본문: 욥기 2-8장
욥이 모든 소유물과 자식들을 빼앗긴 뒤에도 여전한 순전함을 보이자, 사탄의 2차 공격이 시작된다. 두 번째 공격은 욥의 “뼈와 살”을 치는 것이었다(2:4). 욥은 온몸에 난 종기로 고통을 당하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입술로" 원망하지 않는다(2:10). 사탄은 집요하게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욥의 아내는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고, 욥의 친구들은 욥의 참상을 본 후 큰 소리로 울고 칠 일동안 침묵하며 그의 곁을 지킨다. 고통 당하는 이들 곁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머물러 있는가.
3장에서 일곱 낮과 밤의 침묵 후에 욥이 드디어 입을 연다. 침묵을 깨고 욥이 토해 놓은 것은 자신의 출생에 대한 저주였다. 존재 자체가 고통이 된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당한 원인 모를 고통에 대한 정직한 고백이자 탄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욥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한다. 죽은 자들을 부러워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처럼 차라리 죽기를 바랄 만큼 고통 속에 있는 오늘날의 욥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욥 곁에서 침묵을 지키던 친구들이 입을 열기 시작하며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4장에서 엘리바스가 욥에게 첫 번째 대화를 건네는데, 위로라기보다는 충고와 판단의 말들이다. 그는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하며 욥의 고통의 원인이 그의 죄에 있다고 주장한다(4:7). 욥기에서 계속 이어지는 인과응보의 신학이다. 심지어 “어떤 말씀"이 그에게 이르고 “환상"을 보았다면서 자신의 주장에 신적 권위를 더한다(4:12-13).
5장에서 엘리바스의 충고가 계속되는데, 욥의 부르짖음을 어리석은 자의 미련한 행위로 단정한다. 엘리바스에 의하면 욥은 “전능자의 징계"를 복으로 여기고 기꺼이 받아야 한다(5:17). 그는 모든 고난을 하나님이 징계로 여기며, 그 공식 안에서 욥을 판단한다. 엘리바스의 지당한 말들이 욥의 고통을 설명해 내지 못한다. 그의 ‘연구' 속에 하나님은 갇히시지 않는다.
6장에 이르면, 욥을 향한 엘리바스의 정죄와 충고로 인해 욥의 고통이 가중된다. 욥은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전능자의 화살”이 그에게 박혀 “그 독"을 마신 것으로 여긴다(6:4). 하나님이 자신을 공격해 오는 상황 속에서 그는 구원이 아니라 죽음을 바란다. 기력도 없고, 희망도 없다. 그런 욥에게 친구들은 아무런 위로도 힘도 되지 못한다. “개울과 같이 변덕"스러운 그들은 이제 욥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6:15, 21). 오히려 욥은 그들의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탄식한다(6:24). 나의 옳은 말이 과연 누군가를 살리는 말인지, 죽이는 말인지 돌아보자.
7장에서는 욥이 친구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표현하며 항변하고 간구한다. 그는 어째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침 삼킬 동안 내버려 두지 않고 감시하며 큰 고통을 주시는지 묻는다. 이제 그만 “나를 놓으소서"라는 욥의 처절한 고백이 절절하게 들려온다(7:16).
8장에서 욥의 친구들 중 두 번째 인물인 “수아 사람 빌닷”이 등장한다. 고난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욥을 보며 빌닷은 하나님의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죄에 대해서는 벌하시고 의인은 보호하시니 하나님께 회개하고 회복을 이루라고 한다. 그의 자녀들이 죽은 것도 주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8:4). 인과응보의 원리에 갇혀 친구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그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판단받을 것이다. 특정 교리나 신학에 갇혀 누군가를 비판하고 정죄하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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