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가려고 아버지가
벽에 걸린 액자를 떼어냈다
바로 그 자리에
빛이 바래지 않은 벽지가
새것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집에 이사 와서
벽지를 처음 바를 때
그 마음
그 첫 마음,
떠나더라도 잊지 말라고
액자 크기만큼 하얗게
남아 있다
- 안도현, <처음처럼>
이사를 하는 바쁜 와중에도 시인의 눈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액자를 떼어낸 후, 빛이 바래지 않은 벽지가 새 것 그대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액자 크기의 하얀 그 자리를 제외하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습니다. 빛 바랜 벽지는 때묻은 내 마음이고, 익숙해진 안락함이고, 어느새 잃어버린 감사입니다.
그래도, 잘 보이는 벽 한 가운데 첫 마음이 걸려 있습니다. 이사 첫날 벽지 바를 때 그 첫 마음 잊지 말라고 ‘하얗게’ 남아 있습니다. 다 풀지 못한 이삿짐 곁에 두고 손 모아 기도하던 그 마음 잊지 말라고, 쉽사리 잠들지 못하던 첫날 밤의 감사를 기억해 달라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액자 크기만큼’ 남아 있습니다.
세례 받던 날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 신학교 입학식 날 선지동산에 첫 발을 내디던 순간의 두근거림, 목사 안수 받던 날의 감사와 결연했던 다짐, 미국에서의 첫날 밤 어둡고 차가운 기숙사 바닥에 누워 간절히 잡았던 두 손, 시카고로 이사오던 날 홀로 차 안에서 드렸던 기도…. 나이가 들고 주변이 바뀌어도 새 것처럼 남아 있어야 할 첫 마음, 벽에 잘 붙어 있는지 살펴 보아야겠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2:4-5a).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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