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 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는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시인들은다 비슷한가 봅니다. 정호승 시인은 ‘사랑보다 소중한’ 것이 슬픔이라고 하고, 시인 윤동주는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고, 시인 예수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노래하니 말입니다. 심지어 야고보 사도는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하니 참 고약해 보이지 않나요?
추운 겨울 거리에서 떨며 앉아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며 기뻐하는 이에게 ‘나’는 슬픔을 주겠다 합니다. 형벌인가 싶은데,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이라니 축복인가 봅니다.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도 무관심한 이에게 슬퍼할 줄 아는 힘을 주겠다니, 이보다 큰 자비가 어디 있을까요? 밝은 것만 보고 사느라 어두운 것에 눈감고 살던 이에게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시겠다니 이런 큰 복이 어디 있을까요? 슬픔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세상을 보여주시는, 그야말로 은총입니다.
나는 코로나 안 걸렸다고 기뻐하는 건강한 우리에게, 서류미비 이민자들을 보며 나는 ‘합법’이라 안심하는 시민권자/영주권자 우리에게, 흑인들이 당하는만큼 차별당하지는 않아 다행이라 여기는 아시안 아메리칸 우리에게, 주께서 슬픔의 선물 주시기를 간곡히 빕니다.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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