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잊은 성도에게 - 빚은 빛이다 / 나희덕
- heavenlyseed
- 4월 5일
- 2분 분량

아무도 따 가지 않은
꽃 사과야,
너도 나처럼 빚 갚으며 살고 있구나.
햇살과 바람에 붉은 살 도로 내주며
겨우내 시들어 가는구나.
월급 타서 빚 갚고
퇴직금 타서 빚 갚고
그러고도 빚이 남아 있다는 게
오늘은 웬일인지 마음 놓인다.
빚도 오래 두고 갚다보면
빛이 된다는 걸
우리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수 있는 건
빚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걸
너는 알겠지,
사과가 되지 못한 꽃 사과야.
그러고도 못다 갚으면
제 마른 육신을 남겨 두고 가면 되지
저기 좀 봐, 꽃 사과야.
하늘에 빚진 새가 날아가고 있어.
언덕에 빚진 눈이
조금씩 조금씩 녹아가고 있어.
나희덕, <빚은 빛이다>
빚이 빛이라니, 빚지고 사는 게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 모르는 한가로운 소리. 웃고 넘기려는데 “월급 타서 빚 갚고” 그것도 모자라 “퇴직금 타서 빚 갚고” 그러고도 빚이 남았다 하니, 헛말은 아니겠다 싶습니다. 언제쯤 이 무거운 빚 다 갚고 살려나 싶고 그날이 오면 새처럼 날아갈 거 같은데, “우리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수 있는 건 빚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니, 말장난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빚지지 않고 사는 인생 없지요. 꽃 사과는 햇살과 바람에 빚지고, 새는 하늘에 빚지고, 눈은 언덕에 빚을 집니다. 어제 저녁을 먹으며 나는 바다에 빚을 졌고, 오늘 아침에는 땅과 농부들에게 빚을 졌습니다. 어머니 은혜에 빚지고, 벗들과 교우들에게 빚지고, 아내의 사랑과 헌신에 빚지고 오늘도 삽니다. 그 빚이 나를 살게 하는 힘이고, 숨이고, 빛입니다. 두고두고 갚을 빚이 이렇게 많이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빚쟁인가요, 나는.
누구에게도 빚질 일 없이 산다면, 갚을 빚도 하나 없으니 얼마나 쓸쓸한 삶인가요. 이 은혜를 어찌 다 갚고 사나, 하는 마음으로 사는 이에게 빚은 빛입니다. “빚도 오래 두고 갚다보면 빛이 된다는 걸” 하늘의 빚을 갚으려 “제 마른 육신을 남겨 두고” 가신 예수를 보며 배웁니다. 그리고 평생 빚 갚으며 빛처럼 살다간 사도 바울의 큰 말씀 하나 곰곰히 되새깁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롬13:8).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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