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 윤동주, <병원>
윤동주는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이 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제목을 원래 이 시의 제목인 ‘병원’으로 짓고 싶어했다지요. 그 이유에 대해 (그의 시들을 직접 받아 세상에 알린 정병욱에 의하면) 그는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 투성이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답니다. ‘혹 이 시집이 앓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느냐'면서 말이죠. 시인 김응교 교수는 이 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아픈 이들과 함께하겠다는 이 문장은 과연 윤동주 시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음으로 그 아픔에 함께하며 치료를 위해 연대하고 실천하겠다는 다짐이다.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이 말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를 윤동주 식으로 쓴 표현이다. 이 재앙의 시대에 가장 필요한 자세가 아닌가.” - 김응교, <손모아 - 아침에 읽는 시 이야기 1>, 139.
텍사스 우밸디(Uvalde)의 어느 초등학교, 그 아이들이 쓰러졌던 자리를 생각하며 누워봅니다. 차가운 바닥. 들려오는 비명소리. 얼마나 아팠을까요.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시인은 '환자 투성이'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반복되는 총격 사건에 이제는 무뎌지고 무관심해지는 사람들, ‘어차피 안 될이야' 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부름받은 그리스도인 모두를 초청합니다. ‘그가 누웠던 자리’에 잠시만이라도 누워 보자고.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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