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난다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나무는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길가의 풀들을 더럽히며 빗줄기가 지나간다
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
거리마다 풀들이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다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나희덕, <11월>
‘마지막 잎새’ 덕분에 다시 살 용기를 얻은 소녀도 있었다던데, 바람은 매정하게도 그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납니다. 세상에 남겨진 서러움에 우는 줄 알았는데, 나무는 뜻밖에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해 감사합니다. 눈물까지 흘리며, 세상에나.
화창한 햇살도 아니고 ‘희미한 햇살’이 ‘잠시’ 드는 것 뿐인데, 길가 풀들이 드러누워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다네요. 햇살 한 조각도 감사하단 말인가요? 사형수로 독방에서 지내며 자살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신영복 선생은 ‘햇볕' 때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겨울 독방에서 만나는 햇볕은 길어야 두 시간 정도였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한 장 크기였답니다. 그 한 조각의 햇볕이 살 이유가 된 것이지요.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 11월이 다시 찾아왔네요. 미리 껴 입은 외투 사이로 스며드는 추위는 다가올 고통에 대한 예고편에 불과하겠지요. 그래도 ‘남겨진 자비'와 ‘희미한 햇살'에도 감사하는 마음이라면, 우리도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로 빛날 수 있지 않을까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감지한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더 사랑해야겠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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