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손으로 쓴다는 것
“연필로 글을 쓰면 팔목과 어깨가 아프고, 빼고 지우고 다시 끼워 맞추는 일이 힘들다. 그러나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 느낌은 나에게 소중하다. 나는 이 느낌이 없이는 한 줄도 쓰지 못한다. 이 느낌은 고통스럽고도 행복하다. 나의 몸의 느낌을 스스로 조율하면서 나는 말을 선택하고 음악을 부여하고 지우고 빼고 다시 쓰고 찢어버린다.”
“아날로그는 이제 낙후된 삶의 방식이다. 아날로그는 다 죽게 되어 있다. 아날로그는 더 이상 디지털 문명의 대안이 될 수가 없다. 아날로그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슬픔과 기쁨, 고난과 희망을 챙겨서 간다. 디지털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곧바로 간다. 그래서 디지털은 앞서가고 아날로그는 시대의 뒷전으로 밀려난다. 나는 아날로그가 끌고 나가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고난과 희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 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p. 15-16
김훈은 오직 연필로만 글을 쓰기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한평생 기자와 작가로 살아가면서 컴퓨터를 사용하지 못하니 편집자들로부터 눈총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연필로 글쓰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시대에 뒤쳐진 방식인 ‘아날로그가 끌고 나가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고난과 희망’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아날로그는 점점 밀려나고 있습니다. 예배 중에도 스크린에 성경구절이 뜨고 스마트폰에 성경 앱(app)이 있으니 굳이 성경책을 뒤적거리지 않아도 됩니다. 디지털 성경은 내가 찾고자 하는 거기까지 곧바로 갑니다. 몇 장 몇 절을 치면 곧바로 갑니다. 그러나 아날로그 성경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수많은 말씀들을 ‘챙겨서’ 갑니다. 디지털은 여러 메시지(카톡, 전화, 인터넷)가 시선을 분산시키지만, 아날로그에는 말씀 외에 달리 볼 것이 없습니다.
디지털의 시대에 성경을 필사하는 일은 시대에 뒤떨어진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한 자 한 자 써 내려 가는 동안, 우리는 그 말씀을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느끼고 온 몸으로 밀고 들어오는 말씀을 느끼게 됩니다. 휙 하고 무심코 지나쳤던 말씀의 한 구절, 한 단어, 한 획이 손끝을 통해 내 안으로 들어옵니다. 성경을 손으로 쓴다는 것, 육신이 되어 오신 우리 곁에 오신 그분과 조금 더 가까워질 기회입니다. 사순절 기간, 이 소중한 경험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2019년 전교인 성경필사를 처음 시작할 때 나눈 글입니다.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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